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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ive #01

치유환경의 새로운 미래

근거중심적 디자인(Evidence-based Design)

서론

‘치유환경(healing environment)’ 개념은 지난 수십 년간 의료시설 설계에서 마치 ‘성배(the Holy Grail)’와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다. 치유환경이란, 건축가가 제안한 치료시설이 의료진의 진료 행위의 배경이 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환자의 치유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치유환경 개념은 미국의 ‘플랜트리(Planetree)’나 ‘픽커인스티튜트(Picker Institute)’와 같은 비영리 기관들의 주도 아래 생겨난 ‘환자중심 진료(patient-centered care)’ 개념과 접목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의 기계적 기능 중심의 병원에서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병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듯 ‘치유환경’은 병원설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 변화의 하나로서, 건축가들에게 저마다의 창의성을 실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치유환경’ 개념은 원래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구체적인 기준이나 개념적 발전 없이 설계자마다 이 개념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나머지, 모든 병원 프로젝트에서 설계 목표의 하나로 빠짐없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는 더 이상 건축가에게 진정한 목표의식을 주지 못하는 한낱 상투적 문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 ‘치유환경’ 개념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화하고 있다. 바로 ‘근거중심 디자인(EBD: Evidence-based Design)’의 등장이다. 오늘날 EBD는 ‘치유환경’ 개념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켜 주고 병원설계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목표점을 제시해 줌으로써 이 식상한 단어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EBD의 개념과 발생 배경

EBD의 연구, 교육 및 보급에 앞장서고 있는 미국의 비영리기관인 ‘헬스디자인센터(the Center for Health Design)’의 정의에 의하면, EBD란 ”설계의 각 결정 과정에서 현재 이용 가능한 최선의 증거(evidence)에 바탕을 두는 신중한 노력”이라고 정의하고, 목적은 “결과의 향상뿐만 아니라 이후 결정 과정에 적용할 수 있도록 그 성패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BD는 의학분야의 ‘근거중심 의학(EBM: Evidence-based Medicine)’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즉, 환자의 치료를 결정하는 단계에서 의사 개개인의 개별 지식과 경험에 더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최선의 증거들을 양심적이고, 솔직하고,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근거중심 의학’ 개념을 병원설계 분야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EBD는 기존 '치유환경’ 개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병원 설계가 꾸준히 발전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치유환경의 조성’이란 기치 아래 추구되었던 갖가지 시도들이 그 의도와 달리 모두 다 효과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EBD는 ‘치유환경’ 개념이 진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동안 물리적 환경과 환자의 치유 결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 결과가 꾸준히 축적되어 왔고, 이제 건축가도 이러한 객관적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넓게 열린 것이다. 일반건물의 설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병원설계 과정은 그 전문성과 복잡성으로 인해 고도의 조직적, 통섭적(interdisciplinary)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 디자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디자인을 이끌어가는 소수의 제한적 지식과 경험이 매 설계 결정의 주요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건축이 예술과 과학의 결합이라면, EBD는 자의적 결정으로 편향된 기존의 설계 결정 방식에 합리성과 객관성을 보완하여 그 평형점(equilibrium)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EBD의 연구와 적용 추세

‘병원설계와 임상결과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많은 연구가 있다. 1984년에 발표된 울리히(R. Ulrich)의 논문은 오늘날 EBD 연구의 시초로 많이 거론된다. 그는 “조망이 수술 후 환자 회복 속도에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에서 조망이 좋은 병실의 환자들이 그렇지 않은 병실의 환자들보다 평균 16시간 일찍 회복한다는 연구보고를 내놓았다. 이 획기적 논문 이후 미국에서는 2008년까지 1,200여건의 EBD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가 축적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EBD는 디자인을 결정하는 과정에 기존의 연구 결과를 체계적으로 결합해 실질적으로 개선된 디자인 결과물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개개인의 직관과 경험에 의존하는 의도 중심의 설계방식과 차별된다. 여기서 실질적 개선은 원내 감염율, 낙상 건수, 환자 회복 속도, 환자 만족도 조사 등 객관적인 지표의 개선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EBD가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은 앞서 말한 헬스 디자인센터의 주도 아래 2000년에 시작된 ‘페블 프로젝트(the Pebble project)’ 부터로 볼 수 있다. 처음 20여 개 병원들이 참여하여 시작한 이 프로젝트에서, 각 병원들은 신축 및 개보수 작업을 할 때 EBD를 적용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여 조사했는데, 이전과 비교하여 현격한 개선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병원은 50여 개가 넘는다. ‘페블 프로젝트’와 유사한 사례로 페이블 병원(Fable Hospital)이 있다. 이 프로젝트는 300병상 규모의 기존병원을 대체할 수 있는 병원을 짓는 신축 사업이었다. 이 사업에는 여러 EBD의 원칙을 적용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병동에 전체 가변형 1인실, 소위 ‘중증도 적응형 병실(acuity-adaptable unit)’을 채택해 시설한 점이다. 이를 위해 추가된 비용은 초기 투자비의 5% 정도인 1,200만 달러였는데, 시장점유율 증가와 같은 간접적 효과를 포함하여 1년 내에 그 비용을 거의 회수할 수 있었다.

이처럼 EBD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증명되기 시작하자, 미국에서 의료시설을 설계할 때 EBD를 적용하는 것이 점차 기본 사항이 되었다. 최근 미국의 40개 설계사무소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 중 37개 업체가 EBD를 적용하고 있다고 응답하였고, 미 국방부 의무부(military health system)에서는 모든 의료시설 사업에 ‘환자중심’ 개념 및 EBD의 원칙을 적용하기로 지침을 정하였다. 그 외에도 카이저(Keiser)를 비롯한 수많은 영리, 비영리의료기관에서도 EBD는 의료시설 설계의 핵심 방법론으로 정착되었다. EBD는 이론 자체라기보다는 태도(attitude)이자 원칙(principle)이다. 이 원칙은 어느 설계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최근 북미에서는 병원이나 연구소뿐만 아니라, 학교, 오피스, 교도소, 주거 등에서도 적용되고 있으며, 도시설계나 인테리어 디자인의 영역에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EBD의 요소

EBD의 요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환자중심(Patient Centeredness)’ 요소와 ‘환자 안전(Patient Safety)’ 요소가 그것이다. 환자중심 요소가 과거 ‘치유환경’ 개념의 핵심 내용이라면, 환자 안전 요소는 ‘치유환경’의 확장된 개념에 포함되는 요소들이다. 우선 환자중심 요소는 ‘환자중심 진료(patient centered care)’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이 요소는 병원이라는 낯선 환경으로부터 환자의 존엄성(dignity)을 지켜주고, 환자의 스트레스를 경감(stress-free environment)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구체적으로는 환자 정보 관리, 시각적·청각적인 물리 환경의 제어, 영역성의 확보, 과밀현상 해소와 같은 프라이버시 문제, 환경제어 및 선택권, 사회적 교류 및 지원, 길 찾기, 자연적 요소의 치유 효과, 기타 긍정적 기분 전환(positive distraction) 등이다. 누구나 그 중요성에 대해 직관적으로 수긍하는 요소이기는 하나, 변인통제(control variable)가 곤란하여 병원건축을 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 정량적으로 검증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BD 연구를 통해 우리가 직관적으로만 이해하던 것이 검증되면서 이 요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한편 우리의 선입견과는 상반되는

새로운 증거들도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예전에는 환자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 무조건 자극 요소를 없애는 데 집중했지만, 반대로 무료함과 무감각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극도 필요하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다인실의 장점 중 하나로 생각했던 병실 동료와의 소통 문제도 병실 동료가 오히려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게 밝혀짐으로써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병실의 방향(orientation)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남향 배치를 선호해왔지만, 최근 EBD 연구에 의하면 아침햇살이 계절성 정서장애(SAD)나 우울증 환자에게 치유효과가 좋은 것으로 나왔다. 그 결과 동향 병실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환자 안전 요소는 EBD에 의해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기 전에는 간과되어 오던 요소이다. “First, do NO Harm(무엇보다도, 환자들에게 해를 주어선 안 된다).” 이 말은 히포크라테스와 나이팅게일을 거쳐 미국 FGI(Facility Guidelines Institute)의 ‘의료시설 설계 및 시공에 대한 지침서’의 서두에 나오는 문구이다.
우리나라 병원들이 경쟁적으로 취득하려는 국제의료기관 인증제도인 JCI(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의 기준을 살펴보면 핵심인 키워드가 바로 ‘환자 안전’이다.
환자 안전과 관련된 요소들로는 감염 관리(infection control), 공기의 질적 향상(air quality), 낙상 방지, 의료 과실 방지, 소음 제어 등이 있다. 감염 관리의 경우, 미국의 병원 내 감염 건수가 매해 약 200만 명(입원환자의 1/20)에 이르며, 이로 인해 사망하는 환자수도 매해 8만~9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손 씻기 만으로도 원내 감염이 확연히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성 요셉 메디컬 센터(St. Joseph Medical Center)의 경우, 중환자실의 디자인과 세면기 위치 변경으로 원내 감염률이 무려 44%나 감소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의료 과실(medical error) 역시, 과거에는 “시스템은 완벽하다. 실수한 사람을 탓하라.” 식으로 작업자의 주의를 강조하던 방향에서 “사람은 실수한다. 시스템을 바꿔라.”, 즉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식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각 실의 표준화(standardization)이다. 즉 의료기구, 집기, 설비 위치 등을 표준화함으로써 의료진이 직관적,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실수의 유발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외래 레이아웃의 모듈러화, 다목적 수술실(universal OR), 일방향 디자인(same handed design), 중증도 적응형 병실(acuity-adaptable unit) 등이 이와 관련된 디자인 전략이다.
중환자실을 포함한 병동 디자인은 EBD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와 설계 사례가 시도되는 분야이다. 미국은 이제 1인실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비용적인 측면만 제외한다면, 1인실은 다인실에 비해 감염 관리, 환자 프라이버시, 환경 제어 및 선택, 가족 참여 및 의료진과의 소통 용이 등 환자 치유 측면의 모든 점에서 우수하다. 더군다나 미국은 한발 더 나아가 환자가 재원 기간 내내 중환자실-준중환자실-일반병실 등으로 병실을 옮길 필요가 없는 ‘중증도 적응형 병실’을 채택하고 있다. 이 경우 환자 이동은 90%가 감소되며, 따라서 낙상 건수도 75% 줄어든다는 사례 보고가 있다.

 

 

EBD의 국내 적용

치유환경에 대한 ‘반성’이든, 아니면 치유환경의 ‘발전’ 개념이든 EBD는 미국 병원건축 분야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EBD는 단지 병원설계 방법론만의 추세(trend) 중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설계분야에서 ‘실질적인’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최고의 방법론(best practice)’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국내 병원건축계에서는 이따금 몇몇 프로젝트 설계 설명서에서 소개되는 정도로만 그치고 있을 뿐, EBD에 대한 논의는 그야말로 미약한 실정이다. 또 북미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연구 결과가 대부분인 현실에서 앞서 언급한 전체 1인실제와 같은 경우처럼 의료정책을 비롯하여 외국과는 다른 우리나라 의료 현실에 이를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이러한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다.
정림건축 병원설계 팀에서는 2005년경부터 부분적이나마 프로젝트에 이 개념을 적용하여 왔고, 각종 내부 교육 및, 외부 강연을 통해 EBD를 알리는 등 EBD 개념을 국내에 소개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09년 분당서울대병원 신관증축 프로젝트에서는 계획 초기부터 EBD를 설계방법론으로 적용했다. 이것은 이후 정림건축 병원 디자인 방법론의 초석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듈러 외래 레이아웃, 다목적 수술실, 감염 관리 강화, 1인실 및 2인실에서의 일방향 디자인(same-handed design) 등을 적용한 이 병원은 아마도 EBD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설계되고 또 실제로 지어지게 되는 국내 최초의 병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치유환경’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EBD의 미래가 앞으로 설계 설명서를 장식하는 또 하나의 공허한 상투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변에 상존하는,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조사하고 또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바로 최근의 ‘친환경 건축(sustainable architecture)’이다. 친환경 건축은 근본적으로 ‘근거중심(evidence-based)’으로 될 수밖에 없다. 결과나 효율에 대한 구체적 근거 없이 환경을 위한다는 명분만으로 사업주를 설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EBD의 미래

미래의 병원 사업주는 점차 자신이 투자하는 건물에 대한 가시적인 성능과 효율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설계한 건물이 환자에게 안전하고 치료 성과에 도움을 주는지, 공간의 활용효율이 좋은지, 환자와 의료진들이 사용하면서 만족하는지, 관리비가 절감되고 운영효율이 증가하는지 등을 설계자에게 요구하고 또 그 결과를 검증하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에 대한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치유환경’이라는 성배를 찾기 위한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예전의 모호했던 여정과는 달리, EBD는 우리의 앞길을 더욱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미국의 ‘페블 프로젝트(the Pebble project)’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연못에 던진 조약돌(pebble)의 파문이 점점 번져가듯이 이 “근거중심 디자인”이 널리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정림건축의 기본을 되새기다”, 《2013 정림건축 연감집》 발췌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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